【이코노믹포스트=주장환 논설위원】 조선은 제사의 나라였다. 적어도 8촌까지는 제사상에 밥 한 그릇이라도 놓아 추모하는 게 자자손손 내려오던 소중한 예식이었다. 조상에 대한 제사는 양반 가문의 사회적 결속과 존립의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 일은 지금도 문중 사람들의 눈총을 받는 일이다. 그러므로 제사 금지는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려 하는 사람들에게 풀기 어려운 딜레마였다. 천주교 신자에 대해 문중에서 먼저 몽둥이를 들고 나섰다. 나라의 탄압보다 일가친족의 호령이 더 무서운 법이다. 이 과정에서 초기 교회 창설에 중요한 역할을 한 양반신자들이 제 풀에 꺾여 신앙을 버리는 일이 속출했다. 1791년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신해박해(진산사건)라 불리는 최초의 박해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신라 불교의 들불을 당긴 이차돈의 순교이후 1200여년만이다. 윤지충은 어머니 권씨가 죽자 천주교 교리에 따라 위패를 폐하여 불태우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그는 전주감영으로 끌려가 국문을 받았다. 전라도 관찰사 정민시가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호통쳤다. 윤지충은 이렇게 답했다. “신주가 제 부모라고 믿었다면 왜 불살랐겠는가? 그러나 그 신주에는 제 부모의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불사른 것이다.” “네가 맞아 죽어도 그 교를 믿겠느냐?” “제가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배반한다면 살아서건 죽어서건 어디로 갈수 있겠는가?” 그는 결국 전주 풍남문 밖 형상에서 부모에 대한 불효에다가 나라에 대한 불충 그리고 악덕 죄로 외사촌 권상연과 함께 목이 날아갔다. 여전히 제사의 나라다. 신세대들이 주류를 이루면서 조금씩 옅어져 가고 있지만 이들도 여전히 부모나 조상들의 눈치를 보고 있다. 가족이나 친척 중에 교인들이 있으면 참으로 난감하다. 이들은 제사를 거부하고 있지만 그래도 문중 눈치를 보는 사람들은 약식으로 하거나 목례를 하는 식으로 비난을 피해가고 있다. 얼마 전, 한 집안이 골병드는 것을 보았다. 5형제인 이 집안은 그동안 장자인 맏형이 제사를 모셔왔는데 갑자기 못 모시겠다고 형제들에게 통보해 버린 것이었다. 사연을 들어 보니 몇 년 전 새로 들어온 며느리가 신자였는데 그동안 남편은 물론 시부모까지 신자로 만들어 버렸다. 신세대 사고방식이 큰 영향을 끼친 데다 “그 신주에는 제 부모의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불사른 것이다”라는 윤지충의 말처럼 다소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맏형 부부의 변화도 일조를 했다. 제사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가족 형제간의 화목과 소통 등을 장점으로 내세운다. 하지만 요사이 제사 때 형제간의 싸움이 벌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곧 추석이다. 차례를 지낼 텐데 이런 것 저런 것 따지지 말고 그저 물 흐르듯 흘러 보내자. EP jjh@economicpost.co.kr <저작권자 ⓒ 이코노믹포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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