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봉쇄’ 공동 전선···비상시 비축유 주고받는다

원유·LNG 비상시 상호 융통···100억 달러 규모 아시아 원유 확보 프레임워크 동참
양국 정상이 상대국의 정치적 고향과 생가를 교차 방문, 셔틀 외교의 새 지평 열어

박상진 도쿄·베이징 에디터 | 기사입력 2026/05/20 [07:37]

‘호르무즈 봉쇄’ 공동 전선···비상시 비축유 주고받는다

원유·LNG 비상시 상호 융통···100억 달러 규모 아시아 원유 확보 프레임워크 동참
양국 정상이 상대국의 정치적 고향과 생가를 교차 방문, 셔틀 외교의 새 지평 열어

박상진 도쿄·베이징 에디터 | 입력 : 2026/05/20 [07:37]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19일 경북 안동시 한 호텔에서 한일 공동언론발표를 하고 있다. 공동취재

【이코노믹포스트=박상진 도쿄·베이징 에디터】 한일양국 정상이 경북 안동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중동 정세 악화에 대응하기 위한 전방위적 ‘에너지·공급망 동맹’을 구축하기로 합의했다. 양국 정상이 상대국의 정치적 고향과 생가를 교차 방문한 것은 한일 외교사상 처음 있는 일로, 셔틀 외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19일 일본 교도통신에 따르면 한·일 양국 정상은 미·이스라엘의 이란 타격 이후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촉발된 사상 초유의 에너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원유, 석유제품, 액화천연가스(LNG)의 안정적 확보를 위한 협력을 심화하기로 약속했다.

양국 정상은 이번 회담에서 실질적인 에너지 안보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한 고위급 정책 대화체를 신설하기로 했다. 일본 정부 관계자가 전한 바에 따르면, 이 대화체는 인도·태평양 지역의 전략적 비축유 확보 협력과 공급망 마비 등 비상사태 발생 시 양국이 비축한 석유제품 및 LNG를 상호 융통하는 두 가지 핵심 축으로 운영된다.

특히 한국은 일본이 지난 4월 주도해 출범시킨 약 100억 달러(한화 약 13조 5,000억 원) 규모의 ‘아시아 원유 확보 금융 지원 프레임워크’에 공식 참여하기로 뜻을 모았다. 중동 의존도가 대단히 높은 동아시아 두 경제 대국이 공동의 지갑을 열어 원유 수송로 다변화와 대체 에너지원 확보에 나선 셈이다. 이외에도 양국은 반도체 등 핵심 산업의 명줄을 쥔 핵심 광물의 견고한 공급망을 구축하기 위해 공동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정상회담 후 공동 행사에서 한일 협력의 가능성이 "무한하다"고 평가하며, "전례와 관행을 넘어 서로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깊게 한다면 실천적이고 획기적인 협력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카이치 총리 역시 양국이 "인도·태평양 지역의 안정을 유치하는 핵심 축 역할을 해야 한다"고 화답했다.

불과 수년 전만 해도 한일 관계는 강제징용 배상 문제와 영토 분쟁 등으로 인해 수십 년 만에 최악의 파국을 맞이했었다. 그러나 2023년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징용 문제 해법을 발표하며 물꼬를 텄고, 전임 대통령의 급작스러운 계엄령 선포와 탄핵 소추라는 한국 국내 정치의 대격변 속에서도 셔틀 외교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지난해 6월 취임한 이재명 대통령은 과거 ‘대일 강경파’로 분류되던 정치적 궤적과 달리, 집권 이후 한일 관계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실리적 노선을 취하고 있다. 이번 안동 회동은 올해 1월 다카이치 총리의 고향인 나라(奈良)현에서 열린 정상회담에 이은 답방 형태로, 두 정상이 서로의 고향을 교차 방문한 최초의 사례로 기록되었다. 한국 정부는 국빈급에 준하는 예우로 다카이치 총리를 맞이했다.

양국 정상은 미·일·한 3국의 긴밀한 공조를 통해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에 대응한다는 안보 원칙을 재확인했으며, 다음 정상회담은 일본의 온천 휴양지 등에서 이어가기로 기약했다. 다만 최근 베이징에서 열린 트럼프 미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미·중 정상회담이 이번 논의에 미친 영향에 대해 일본 정부 관계자들은 "외교적 대화 내용"이라며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다.

이번 한일 정상의 안동 회동은 이재명 정부의 외교 패러다임이 명분보다 ‘철저한 생존과 실리’로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이정표다. 현재 글로벌 정세는 긴박하게 요동치고 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베이징에서 중국과 전격적인 무역 대타협을 이뤄내며 자국 우선주의 세력판을 짜는 동시에, 중동에서는 이란의 석유 인프라 타격을 만지작거리며 호르무즈 해협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러한 거대한 고래들의 싸움 속에서 한국과 일본은 ‘에너지 고립’이라는 동일한 실존적 위기에 직면했다.

과거 민족주의적 명분에 가로막혀 있던 한일 관계가 비상시 비축유를 주고받는 ‘에너지 혈맹’ 수준으로 급진전할 수 있었던 동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회담 중 한·중·일 3국의 "상호 존중과 공동 이익"을 언급한 것 역시, 미·중 대타협 국면에서 한국이 소외되지 않기 위해 일본을 지렛대 삼아 동북아 다자 협력체제로 나아가겠다는 포석으로 풀이된다.

결국 안동 생가 방문이라는 감성적 외교 수사 뒤에 숨은 본질은 중동발 에너지 쇼크라는 급한 불을 끄기 위한 두 이웃 나라의 생존 전략이다. 이재명 정부의 이러한 유연한 노선 선회는 국내 지지층의 반발을 부를 수 있는 정치적 부담을 안고 있지만, 당장 닥쳐온 경제적 파국을 막기 위한 불가피하고도 현명한 선택으로 평가할 수 있다. 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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