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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松 건강칼럼]처칠과 덩케르크(Dunkirk) 정신
다키스트 아워(Darkest Hour)
기사입력  2018/02/24 [13:54] 트위터 노출 2,034,605 페이스북 확산 0   이코노믹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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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믹포스트=박명윤 칼럼니스트]
윈스턴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성공도 실패도 영원하지 않다. 중요한 건 굴복하지 않는 용기다. 우린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 승리가 없으면 생존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우리 국민 모두가 새겨들어야 할 명언이다. 

 

설 명절 연휴 첫날(2월 15일) 오전에 아내와 함께 서울 신촌 ‘필름포럼’ 소극장에서 <다키스트 아워(Darkest Hour)>를 관람했다. 이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당시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의 위장평화 공세 속에서도 영국을 지킨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 총리의 일화를 다룬 영화다. ‘암흑의 시간(Darkest Hour)’는 처칠 총리가 1940년 6월 18일 연설에서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侵攻)이 끝난 후의 처참한 상황을 가리켜 한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World War II)는 1939년 9월 1일에 일어나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이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의 대독 선전포고에서 발발하여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종결된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5천만 인명 피해를 낳은 전쟁이다. 전쟁은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 등 3국을 근간으로 한 추축국(樞軸國, Axis Powers) 진영과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중국 등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聯合國, Allied Powers) 진영의 대립으로 진행되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 독일 국경부근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브라우나우에서 세관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3년 13세에 아버지를 잃자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실업학교를 퇴학한 후 미술대학에 진학했지만 재능을 인정받지 못했다. 18세 때 어머니도 잃었고 오스트리아 빈에서 물려받은 유산과 그림엽서 등을 판매하면서 생활하였다. 도서관에서 독학으로 지식을 습득하였으며, 이때 인종이론과 반(反)유태주의를 익혔고 히틀러의 정치사상이 형성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발발하자 독일에 대한 애국심으로 열광하였던 히틀러는 지원병으로 입대하고 무공을 세워 훈장을 받았다. 독일이 패전한 후 1919년 9월에 독일노동자당(후에 나치스)이라는 반유대주의적인 정당에 가입하였다. 1930년 총선거에서 나치스는 사회민주당에 이어 제2당이 되었으나 연립내각에 참여할 것을 거절하였다. 히틀러는 1932년 대통령선거에서 한덴부르크에게 패하였다. 

 

대통령 한덴브르크는 정계와 경제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1933년 1월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하였다. 히틀러는 보수파와 군부의 지원을 얻어 반대파를 탄압하고 1933년 7월 일당독재(一黨獨裁)체재를 확립하였다. 1934년 8월 대통령이 죽자 대통령의 지위를 겸하여, ‘총통 겸 수상’이라 칭하고 명실상부한 독일의 독재자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는 1945년 패전에 직면하자 4월 30일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서 애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리고 다음날  베를린이 함락되지 직전에 자살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 윈스턴 처칠은 제7대 말보로 공작 존 스펜서 처칠의 삼남 헨리 스펜서 처칠과 미국의 부호 레너드 제롤의 딸 제니 게롬 사이에서 태어났다. 처칠은 학교에서 말썽꾸러기 낙제생이었다. 해로우 학교를 졸업하고 삼수(三修) 끝에 1893년 샌드허스트 사관학교에 입학했지만, 졸업은 150명 중 8등을 했다. 1900년 보수당 후보로 출마하여 25세에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보수당의 보호관세정책에 반대하여 1904년 자유당으로 옮겼으며, 1906년부터 자유당 내각의 통상장관, 식민장관, 해군장관 등을 역임하며 승승장구(乘勝長驅)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작전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1915년 해군장관직에서 물러났지만, 1917년 군수장관으로 입각하여 육군장관 겸 공군장관, 식민장관 등을 역임했다.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과 노동운동에 대한 의구심을 품은 처칠은 분열로 지리멸렬(支離滅裂)해진 자유당을 떠나 보수당으로 복귀했다. 

 

처칠은 아마추어 수준을 뛰어넘는 화가(畵家)이기도 했으며, 신문에 에세이와 시사평론을 많이 기고했다. 또한 소설, 전기, 회고록, 역사서 등을 집필한 정력적인 작가, 저술가였다. 그는 195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처칠은 1945년 총선 패배 뒤 1951년 다시 총리에 취임하고 경(卿)의 칭호를 받았지만, 1955년 당수 자리를 이든(Anthony Eden, 1897-1977)에게 물려주고 하원 평의원으로 머무르다가 1964년에 의원직에서 물러났다. 처칠은 1965년 1월 24일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002년 BBC가 영국인 1백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위대한 영국인 100명’ 가운데 처칠이 1위를 차지했다. 

 

<다키스트 아워>는 영국 해군 장관 출신의 정치인 윈스턴 처칠이 전시(戰時) 내각의 총리로 임명되는 1940년 5월 10일부터 덩케르크 작전(다이나모 작전)을 지휘한 직후인 5월 28일까지 19일간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작전 지휘와 관련된 반대 진영과의 갈등, 신념을 지키기 위해 끝없이 이어기는 고뇌가 펼쳐져 영화를 보는 동안 긴장감을 놓칠 수 없게 만든다. 

 

2차 세계대전 중, 영국군(軍)과 프랑스군은 독일군에게 밀려 프랑스 해안가 덩케르크(Dunkirk)에 고립된다. 다이나모 작전(Operation Dynamo)은 1940년 5월 26일부터 6월 4일까지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행해진 작전 중 하나로서 덩케르크 전투에서 벨기에군과 영국 원정군 및 프랑스군 등 총 33만8천여 명을 구출할 목적으로 실행된 작전이다.

 

영국 해군 베트람 렘세이 중장이 작전을 계획하여, 윈스턴 처칠 수상에게 다이나모 룸(‘다이나모’는 도버성(Dove castle) 지하의 해군지휘소의 방 이름)에서 이 작전에 대한 개요를 설명한 것에서 ‘작전’의 명칭이 유래되었다. 5월 26일부터 9일 동안 860척의 선박이 동원되어 총 338,226명의 병사(영국군 192,226명, 프랑스군 139,000명)를 덩케르크에서 구출하였다. 


덩케르크의 작은 배들(Little Ships of Dunkirk)에는 여러 종류의 어선, 유람선, 화물선, 구명정 등 민간선박들이 긴급히 징발되어 병사들을 해안에서 바다에서 대기 중인 대형 선박(구축함)으로 운반했다. 이 작은 배들의 ‘기적’은 영국 국민들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어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 작전은 성공했지만, 영국군이 프랑스에 반입한 화포(火砲) 등 중장비 및 차량은 모두 버리고 철수했다. 

 

다이나모 작전이 완료되기 전, 처칠은 작전의 전망에 비관적이어서 하원에서 “무겁고 엄숙한 이야기를 전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 후 처칠은 작전의 성과를 ‘기적’이라고 했으며, 언론도 ‘대실패가 대성공이 되었다’고 소개했다. 영화 속에 묘사된 영국 국민의 단호한 항전(抗戰)의지가 감동스러웠다. 영국 국민이 단결하여 역경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때 사용된 ‘덩케르크 정신’이란 용어를 지금도 영국인에게서 들을 수 있다. 우리도 단결과 극복 의지를 다지는 ‘덩케르크 정신’을 배워야 한다.
 

영화를 관람하면서 감동스러운 장면은 당시 영국 내각과 정치권에서 히틀러와의 평화 협상을 종용하는 정치인들에게 처칠은 “호랑이 입속에 머리를 집어넣고 어떻게 호랑이와 협상을 한단 말인가!(You cannot reason with a tiger when your head is in its mouth!)”라고 일갈(一喝)한 장면과 대국민 라디오 연설에서 “우리는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We shall never surrender!)”는 결연한 태도였다.  

 

현재 우리나라 좌파정권이 핵(核)으로 自由大韓民國을 위협하는 북한의 독재정권과 협상을 시도하려고 하는 것과 비슷한 처지이다. 해리 해리스 미 태평양사령관은 2월 14일 하원 군사위원회에서 북한의 김정은은 자신의 할아버지(김일성)와 아버지(김정일)가 실패한 한반도 적화통일(赤化統一)을 추진 중인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또한 북한의 핵 야욕을 체제 보호 수단으로만 보는 것은 스스로를 제한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키스트 아워> 영화에서 필자 개인적으로는 처칠이 편지를 쓸 때 편지 내용을 말하면 여비서가 수동(手動) 타자기(typewriter)로 찍는 장면이 필자가 50여년전 UNICEF에 근무할 당시 주한UNICEF 대표였던 영국인(Mr. Alan E. McBain)이 한국인 여비서에게 편지 내용을 말하면 속기(速記)로 받아 타자기로 찍었던 것이 생각났다. 필자는 1965년 1월 UN직원(official of the United Nations)으로 임용되어 국제연합아동기금(UNICEF)에서 25년간 근무했다. 1960년대 당시 사용한 타자기는 손으로 조작하는 수동이였으며, 후에 전기를 사용하는 전동(電動)타자기, 그리고 1980년대에 들어서 컴퓨터를 이용하여 문서를 작성했다. 당시 UNICEF 사무실에서는 미국 왕컴퓨터사 제품인 ‘Wang computer’를 사용했다. 

 

필자는 1961년 1월 대학생 영어서클인 ‘Pine Tree Club(PTC)’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클럽에서 매주 토요일 오후 영어로 회의를 진행하고, 영자 신문(Weekly The Star)을 발행하였기에 종로 YMCA ‘타자(타이핑)학원’에서 영문타이핑(typing)을 배웠다. PTC 창립60주년기념행사를 오는 11월 3일 롯데호텔에서 거행한다. 

姜石熙 前 미국 Irvine 시장(서울PTC), 千英宇 前 영국대사(부산PTC), 金富謙 행정안전부장관(대구PTC), 李萬儀 前 환경부장관(광주PTC) 등 그동안 1만 명이 넘는 ‘PTCian’들이 배출되어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다. <다키스트 아워> 상영극장에서 1960년대 경북대 재학 중 대구PTC에서 활동하였고 현재 칼럼니스트로 활약하고 있는 丁海均 前 현대그룹 현대철탑산업주식회사 대표이사를 만나 정담을 나누었다. 

<다키스트 아워>는 오는 3월 열리는 미국 아카제미 시상식에 작품상ㆍ촬영상ㆍ남우주연상ㆍ미술상 등 6개 부문 후보에 오른 영화다. 전 세계에서 흥행에 성공한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상영관을 찾는 것도 쉽지 않다. 남남갈등으로 국민의 분열이 심화되고 있는 우리나라는 처칠과 같은 위대한 리더십을 가진 정치 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하다. 이 영화를 대통령을 위시하여 여야정치인들이 꼭 관람할 것을 권하고 싶다. EP 

     

글/ 靑松 朴明潤(서울대학교 保健學博士會 고문, 대한보건협회 자문위원, 시사주간, 아시아記者協會 The AsiaN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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