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포스트=주장환 칼럼니스트] 만일 당신이 멋진 인생을 살아가려면 강한 의지와 약한 집착을 가져야만 한다.
이 말을 매우 아이러니컬해서 처음엔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참으로 그럴 듯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진인사 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말이 있다. 사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어떤 일이든지 노력하여 최선을 다한 뒤에 하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일을 성실히 하지 않고 요행을 바라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강조하는 말이다.
이 말은 삼국지에 나오는 말이다. 삼국시대에 적벽에서 위나라 조조가 오나라와 촉나라 연합군과 벌인 전투가 적벽대전(赤壁大戰)이다. 이 처절한 싸움 중에 촉나라의 관우는 제갈 량으로부터 조조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화용도(華容道)에서 포위된 조조를 죽이지 않고 길을 내주어 달아나게 하고 돌아왔다. 처음에는 명령을 어긴 관우를 참수하려 하였으나 그만둔다.
제갈량은 유비에게 이렇게 말한다. "천문을 보니 조조는 아직 죽을 운명이 아니므로 일전에 조조에게 은혜를 입었던 관우로 하여금 그 은혜를 갚으라고 화용도로 보냈다. 내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쓴다 할지라도 목숨은 하늘의 뜻에 달렸으니, 하늘의 명을 기다려 따를 뿐이다(修人事待天命)"라고 한 유명한 고사다.
이 말에는 오늘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골자가 들어 있다. 다시 말해 의지는 강하게 가지지만 집착에서는 벗어나라는 말이다. 최선을 다하고 나서 그것이 이뤄지지 못할까 집착을 가지면 그 집착으로 인해 더 불행해질 수도 있다.
자신이 바라는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하고, 그런 다음엔 그것이 되어가는 대로 내버려 둬라. 때로는 자신이 의도했던 결과를 얻지 못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인생이다. 자신의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그저 그것을 향해 계속 움직여나가야 할 뿐이다. 때로는 세계가 나를 위해 다른 계획들을 가지고 있고 종종 그 계획들은 당신이 자기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것들보다도 더 나은 것들일 때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두면 오히려 더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실패를 이기며 현명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하다. 미리 실패와 성공의 두 그림자를 안고 있는데 무엇이 두렵고 안타깝고 아쉽겠는가.
과감한 투자는 모든 것을 버리는 자세에서 나온다. 그것은 역으로 이야기 하면 바로 강력한 자신감이다.
로욜라 대학의 앤드루 키트 수석 연구원은 "기업가들도 사업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성공을 향한 목적의식과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두려움을 압도한다"고 말했다.
카지노 호텔 재벌인 셀던 아델슨은 이런 자신감으로 일어선 사람이다. 아델슨은 1995년 라스베이거스에서 정보기술(IT) 종합전시회인 컴덱스(COMDEX)를 열어 일약 명사로 등장한 인물이다.
그는 컴덱스를 시작으로 샌드 호텔을 사들이며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채권 발행 등으로 돈을 모아 4000개의 룸과 초현대식 시설을 가진 베네치안 호텔을 완성했다.
이 호텔은 최신 비즈니스 시설을 갖춰 사업가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2004년에 설립 규정이 복잡한 마카오에 자신의 카지노 호텔 체인을 건설하며 마카오를 제2의 라스베이거스로 만드는 데 앞장섰다.
미국 뉴욕주에 소재하고 있는 코닝(Corning)사는 1990년대 말 IT 붐을 타고 통신용 광섬유(optical fiber) 사업에 진출, 크게 성공한 기업이다. 당시 광섬유부문 책임자였던 웬델 윅스씨가 성공신화의 주인공이다. 이 회사는 IT 거품이 꺼지기 시작하면서 100달러가 넘던 주가가 2002년에는 1달러까지 폭락했다.
웬델 윅스는 날개 없이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낙하산을 펴는 법을 알았다. 그는 LCD 기판 유리를 개발하여 난관을 돌파했다. 세계적인 LCD TV 붐을 타고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하더니 4년만에 흑자로 돌아섰다.
그는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은 균형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꾸준히 혁신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전통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고, 신기술에 대한 투자를 계속할 것입니다.
지금도 광학기술을 활용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있고, 환경기술 분야에도 꾸준히 투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빌려서까지 지나친 위험을 지겠다고 나서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웬델 윅스는 2002년 위기 당시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어려웠지만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사실 코닝의 150년 역사에 위기는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위기를 이겨낸 힘은 헌신적인 직원들이 전 세계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힘을 믿습니다.
모든 위대한 성취 뒤에는 교육, 훈련, 연습, 규율, 그리고 희생이 따른다. 우리는 그 대가를 기꺼이 치러야만 한다.
성공적인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선 으레 많은 것들이 요구되긴 하지만, 요구되는 것을 ‘기꺼이 하려는 마음’은 우리들이 감당하기 힘든 도전들, 방해들, 고통 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 준다.
중요한 건 이기려는 의지가 아니다. 그건 누구나 가지고 있다. 중요한 건 이기려고 준비하려는 의지인 것이다.
목표 달성을 위해 필요한 건 뭐든지 기꺼이 하려는 마음은 그것이 무엇을 필요로 하든, 얼마나 오래 걸리든, 무슨 일이 생기든지 간에 기필코 해내고야 말겠다는 생각으로부터 생겨난다.
미국의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은 이렇게 말했다. “재능은 식탁 위의 소금보다도 더 값싼 것이다. 재능 있는 사람과 성공한 사람의 차이는 리스크를 감내하는 정신과 많은 양의 고된 일이다."
미국의 경제지 포브스는 '미국 400대 부자'에 오른 사람들의 성공 비결을 소개하며 부자가 되는 가장 빠른 길은 리스크를 무릅쓰는 정신이라고 분석했다. 미국 400대 부자 대부분이 불리한 상황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투자를 하는 과감한 자세를 보였다는 지적이다.
포브스 400에 선정된 부자들 대부분은 위험을 일반인들과 다르게 바라본다. 철저한 계산 아래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매진한다. 그 다음부터는 자신의 모든 역량을 집중해 투자를 성공으로 이끌어낸다.
석유 재벌 해럴드슨 라파예트 헌트는 35세가 되던 1924년 홍수로 목화 농장을 잃은 뒤 포커 선수로 변신했다. 그는 도박판에서 마련한 목돈으로 텍사스 유전 지대의 유정에 투자했다.
그 유정에서 석유가 콸콸 쏟아져 그는 백만 장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리스크를 감수하고 또 다시 투자했다. 그는 '더 많은 유정을 팔수록 석유를 발견할 확률은 높아진다'는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다.
토마스 하디 ‘비운의 쥬드(Jude the Obscure)는 주인공인 쥬드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쥬드와 수의 러브 스토리를 빌려 19세기의 영국사회를 바탕으로 한 쥬드의 일생을 다루는 이 소설은 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목표한 것을 반드시 이룰 수 있는 의지와 그것을 달성해가는 과정을 극복해 낼 수 있는 확고한 목표의식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보여준다.
쥬드는 필롯슨 선생님처럼 대학에 가고 교회에 성직자가 되기 위해 크라이스트 민스터로 가기위한 꿈을 가진다. 청년이 되기까지 그리스어, 라틴어를 독학하고 성경을 독파해 나가는 과정은 하고자하는 목표의식이 없으면 되는 일이 아니다.
인생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선택한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골프를 칠 때 홀 컵을 지나치게 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다. 인생이나 업무도 리스크를 무릅쓰고 시도하지 않으면 아예 성공할 일이 없다.
시스티나 성당 천정화를 그리기 위해 4년 동안 누워 지냈던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내가 뛰어난 기술을 얻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알게 된다면, 그 기술이 전혀 대단해 보이지 않을 것이다.”
change 의 g를 c로 바꾸면 chance가 되듯이 변화는 곧 기회의 다른 말이다.
당신이 계속해서 대단한 것들을 성취해 나갈 수 있는 성공적인 사람이란 사실을 스스로에게 정말로 납득시키기 위해 당신 삶에 있어서의 성공 경험 100가지를 리스트를 만들어보라.
아주 작은 일이라도 좋다. 하찮고 별 볼일 없는 것들부터 가슴 벅찼던 일 까지 모두 적어 항상 가슴에 품고 다녀라. 매번 자기가 어떤 승리를 거둘 때마다, 그것을 적어 두고 늘 보아라. 그러곤 중요한 무슨 일이 있을 때 그것을 읽어 보면서 자신감을 회복하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소 두려운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 그 이전에 자신이 노력을 했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던 모든 순간에 정신을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자신감을 해치고, 자신이 또 다시 실패할 거라는 그들의 두려움을 살찌우게 된다. 그렇게 하는 대신 자신의 승리 일지를 계속 기록해내가고 참조하는 것은, 당신이 성공에 계속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준다.
가능한 한 빨리 당신 자신의 승리 일지를 쓰기 시작하라. 만일 원한다면 그것을 사진들, 증명서들, 메모들, 그리고 자신의 성공들을 생각나게 해줄 그 외의 다른 것들이 담겨져 있는 스크랩북처럼 멋지게 장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 이제 바로 시작하라, 망서리면 또 한발 늦어진다.
28살에 상원의원에 도전하여 대공항과 2차세계대전을 극복한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어머니 사라 델러노 루즈벨트 역시 아들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을 그런 여자였다.
특히 아들이 소아마비라고 부르는 척수 회백질염이 발병하여 고통과 절망에 몸부림칠 때 아들을 건져 낸 것도 그녀였다. 당시 소아마비는 잘못하면 전신 마비가 오기도 하는 그런 무서운 병이었다.
그녀는 처음에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절망감을 느꼈다.
루즈벨트를 낳을 때 고통이 다시 상기되었다. 사라는 루즈벨트를 낳을 때 굉장한 고생을 했다, 너무 고통스러워하지 의사가 클로로프롬을 너무 많이 투여하여 의식을 잃기도 했다.
사라가 나중에 “둘 다 죽을 뻔 했다.”고 할 만큼 난산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다.
이미 마음 속으로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할 마음자세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라는 아들에게 하이드파크로 돌아가길 권했다.
그곳엔 조상들의 툭 터인 대지가 있었고 그리운 친지들과 고향의 냄새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곳에서라면 자신의 아들을 마음껏 돌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루즈벨트의 아내 엘리아노가 하이드파크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했다. 그녀는 루즈벨트에게 공직생활을 지속하도록 권했다. 사라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며느리의 말에 따랐다. 그리고 당시 경험은 루즈벨트에게 오히려 약이 되었다. 그의 친구였던 루이스 하우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육체는 망가졌지만, 정신은 눈부시게 단련되었다. 그는 누워서 온갖 생각을 하곤 했다. 날이 갈수록 그의 사고는 넓어져 갔고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관점에서 사물을 관찰하고 깊이 생각하는 방법을 깨닫게 되었다. 병들고, 굶주리고, 신음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침대에서 키가 부쩍 자라고 있었다.”
사라는 이때 어린 시절 그녀가 유럽을 여행하다가 아들이 아프다는 소리를 듣고 급거 귀국, 학교 기숙사를 한밤에 찾아갔던 기억을 떠올렸음에 분명하다.
사라는 당시 아들을 보기위해 기숙사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아들이 자고 있는 방의 창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당시엔 면회가 엄격히 제한되어 있어 이 사실이 학교에 발각되기라도 하는 날이면 퇴학감이었다.
그녀의 아들에 대한 감시감독(?)은 도가 넘어 보인다. 아들이 하버드대학에 재학 중일 때는 보스턴에 아파트 한 채를 빌려 놓고 아들의 일상을 간섭하고 통제했다.
아들이 대통령이 되자 그녀는 백악관을 자신의 기준에 맞추려 했으며 아들이 이혼하려 하자 경제적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협박해 이혼을 막아내기도 했다. 하나님의 사랑 아래서 원칙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었다.
이 원칙은 곧바로 아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루즈벨트가 원칙중심의 리더십으로 자신의 정치적 자질을 발휘할 수 있었던 발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류가 보편적으로 추구해 온 가치를 원칙적으로 적용하여 대공항 동안 보다 더욱 역동적인 미국을 만들어 낸 ‘협동적공동부(cooperative commonwealth)를 창출해 냈고 국민을 통합시킬 수 있는 원칙중심의 새로운 사회상을 창조해 냈다.
루즈벨트 집안은 상당한 명문가였다. 사라 집안 역시 잘 알려진 집안이어서 루즈벨트에게는 자본가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녔다. 특히 노동자들에게는 고깝게 보였던 모양이다. 노동운동가 프랜시스 퍼킨스는 명문가 출신의 루즈벨트에게는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그도 나중에 루즈벨트를 이렇게 평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포근한 마음씨와 겸손함, 더욱 심오해진 철학을 가지고 세상에 다시 등장했다. 더불어 그는 고통의 밑바닥에 갔다 온 사람답게 고통받는 사람들의 문제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사라는 특히 아이에게 어린 시절부터 견문을 넓혀 주었다. 루즈벨트가 14살이 되던 해까지 유럽을 14번이나 여행시켰다. 지금이야 별것 아니지만 당시에 미국서 유럽을 다녀오려면 보통 정성을 가지고는 안되는 일이었다.
그 여행을 통해 루즈벨트는 견문은 물론이고 유럽 사회생활 특히 역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됐으며 자신보다 나이가 많고 훌륭한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됐다. 역사가들은 이때의 유럽에 대한 인식이 나치 등장에 대한 그의 외교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사라는 유모를 제치고 자기 아들은 자신의 손으로 처리한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부유한 집안에서는 아이들 대부분 유모의 젖을 얻어먹고 자랐으나 사라는 꼭 자신의 젖을 먹였다. 그녀는 그리고 아이의 모든 것을 일기식으로 기록해 놓았다.
이것은 자신의 잘못을 점검하고 아이의 상태를 되새기게 하는 가장 좋은 버릇 중 하나였다. 그녀는 아이의 특질을 무시하거나 엄마 멋대로 하려 하지 않았다.
루즈벨트가 5살 때 사라의 잔소리가 지겨웠는지 “난 자유롭고 싶어”하고 소리치며 반항 한 적이 있는데 통제가 너무 심했다고 생각한 사라는 다음날 아이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하루동안 제멋대로 놀고 동네를 쏘다니다 돌아온 아이는 이튿날 스스로 엄마의 통제 속으로 들어왔다.
나중에 루즈벨트는 평생 동안 어머니의 관심과 비판을 받고 싶어 했다고 전기작가들은 이야기 한다. 루즈벨트의 일과를 보면 오늘날 우리 아이들과 다르지 않다.
오전 8시 아침식사를 한 다음 교과목이 종일 짜여져 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아이들과 자주 만나지 못해 외톨이가 되었다. 이것이 나중에 결과적으로 좋은 상황으로 나타났지만 자칫 사회성이 결여된 사람으로 키울 뻔했다.
그러나 사라는 아이가 외롭다는 사람들의 비난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하면서도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사실로 미뤄 봐 모든 것을 다 완벽하게 갖춘다고 해서 반드시 위대한 인물이 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EP <저작권자 ⓒ 이코노믹포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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